슬랙부터 지우자

알림 지옥 멈춰!

“11:00, 개발자 면접, 회의실: 00”
”14:00, 00 회의, 회의실: 00”

제가 매일 아침 9시에 받는 슬랙 알람입니다. 구글 캘린더와 연동되어 제가 까먹지 않도록 리마인드 해줘요. 그리고 시간은 좀 달라도 매일매일 시장/성장지표 등도 알람으로 울려줍니다. 하지만 이건 양반이에요. 실시간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이 감지되었을 땐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슬랙으로 알람이 옵니다. 많은 스타트업에서 쓰는 SlackOps 라는 스타트업 운영 시스템이에요. 최대한 사람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도록 자동화해 놓고, 문제가 생겼을 땐 슬랙으로 알림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죠.

내가 느끼는 무게감

저는 현재 회사에서 실무자로서 웹 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 내 서비스들을 만드는 일도 하지만, 임시 리더로서 프로덕트를 관리하는 일을 해요. 장애가 발생하거나 서비스 퍼포먼스 지표 등이 하락하면 추적하고, 개발자 경험을 상승시키기 위한 다양한 자동화 및 개발을 맡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슬랙 알람은 정말 중요합니다. 장애가 났는지 서비스에 직접 들어가서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뭔가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바로 알려주니까요. 하지만 이건 업무 중엔 정말 편한데, 퇴근하고 나서나 휴가 중에는 썩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최대한 중요한 알림만 받도록 설정도 멘션을 받거나 특정 채널만 받도록 최소로만 해뒀습니다. 그래도 심심치 않게 울려요. 슬랙을 알림만으로 들어가는것도 아닙니다. 에러 채널에 밤 사이에 뭐가 쌓였나 혹은 현재 프로젝트 채널에서 어떤 스레드들이 오가고 있나 빈번하게 확인해요. 뭐 이런 점은 회사에서 신뢰를 쌓기 에 매우 좋습니다. 소통을 잘하는 사람의 기준 중 하나는 빠른 피드백 이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제 시간과 마음을 뺐어가요. 번아웃 오기 딱 알맞은 상태인 거죠.

그냥 삭제 해보기로 했다.

결국 슬랙을 삭제했습니다. 아 물론, 사내 메신저이기 때문에 영영 안 쓰는 건 아니고요, 연말 휴가기간인 5일 간만요. 그냥 모든 알림만 꺼볼까도 생각했지만, 이전에 몇 번 해보니까 제가 습관적으로 슬랙을 들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삭제를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 같았어요. 5일동안만 저를 슬랙 없는 세상에 고립시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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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까지만 보지 말자!

이번 회고여행과 같이 목적이 있는 휴가 기간에도 랩탑을 부여잡고 문제 해결을 위해 낑낑대는 게 과연 맞나 싶었던 거죠.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조직이 맞는지에 대한 작은 실험을 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결과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내가 없다면

내가 없다면 회사가 안 돌아갈 텐데?

직장인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라고 하죠. 만약 내가 없이 회사가 안 돌아가는 수준이라면 둘 중 하나인 겁니다. 당신이 대체불가능한 인력 인 C레벨급, 리드급 인재라서 해당 의사결정을 할 때나 고수준의 문제를 해결할 때 대신할 사람이 없거나 온갖 일이란 일은 혼자 다 하고 있어서 진짜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거나예요. 전자면 그 무게만큼의 금전적 보상과 책임감이 있을 테니 그럴 수도 있다 해도 후자면 연봉을 팍팍 인상해달라고 하거나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일 겁니다.

나 없이도 안 돌아가는 회사는 당신이 아니라 회사 시스템이 잘못 된 겁니다. 비즈니스의 측면에서 급한 문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할 거예요. 그 정도가 아니라면 급한 문제가 아닐 거고요.

슬랙을 삭제한 지 3 영업일 째

오늘로 슬랙을 삭제하고 맥이나 휴대폰으로 슬랙을 한 번도 접속하지 않은지 3 영업일째입니다. 내일이면 주말이 시작되니 더 길어지겠지만 큰 의미는 없겠죠? 아직까지 어떤 유선연락이나 메일 같은 다른 수단으로 컨택하지 않았어요.

이 말이 제가 그간 해왔던 일들이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당장 제가 며칠 없어도 회사는 돌아가고 내가 즉각 랩탑을 켜서 대응해야 할 만한 이슈가 발생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겁니다. 적당한 이슈는 적당히 사내에서 누군가 처리해줄 것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이슈는 미뤄주겠죠. 하지만 저밖에 못 다루지만 촌각을 다투는 이슈는 발생하기 힘들어요.

저는 오늘도 습관처럼 슬랙이 있던 폴더를 열어봤어요. 없으니까 다시 닫긴 했는데, 습관이 참 무섭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소통한다는 건 꽤 고무적인 모습인데 반대로 그만큼 개인 시간과 마음을 할애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시간에 대한 온전한 점유율이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어요.

저는 애플워치를 사용하고 있는데, 며칠 동안 조용하니 조금 이상하기도 했어요. 슬랙은 정말 자주 울리는데, 이게 없어지니까 가끔 카톡이나 인스타 메시지가 올 때 말고는 아예 안 울립니다. 사실 핸드폰 알림은 일부러 안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애플워치는 손목에서 진동이 오니까 안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물론 다시 설치할 거예요

저는 다시 출근하는 날인 1월 2일에 다시 슬랙을 설치할 것이고, 다음 장기 휴가 전까진 아마 다시 삭제할 일은 없을 거예요. 남들 다 안 한다고 저도 안 하면 퇴근 후나 주말에 서비스가 다운되면 사용자들은 서비스를 전달받지 못하니까요.

다만 이번 회고여행과 맞물려서 회사와 아예 단절한 삶을 살아보니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않았던 조용한 사직자(Quiet Quitting)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기 위해선 본인의 신뢰와 회사의 시스템과 지원 이 얼마나 절실한지요.

완벽히 분리해낼 수도 없고, 분리된다고 해도 완벽히 생활에 집중할 수도 없는 건 사실이지만 확인해야 할 메신저가 현재 내 휴대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위안이 된다는 게 더 나아가 조용한 사직자들의 확장된 태도들과 맞물려 그들의 여러 패턴들을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존중은 이해로부터 나오는 거니까, 저도 어딜 가든 이와 같은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알림 지옥으로부터

저희 회사는 슬랙을 사용하기 때문에 예시로 들었지만, 슬랙 말고도 다른 사내 메신저용 서비스 많을 거예요. 카톡을 쓰는 곳도 많고요. 이메일 지옥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게 뭐든 변하지 않는 본질은 우리가 지속가능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물론 이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는 지금처럼 알림이 오더라도, 정말 당장 해결해야 하는 긴박한 문제가 아니면 알림이 오지 않도록 하고, 긴박한 문제는 하는 사람만 하지 않고 다 같이 신경 써주는 문화 같은 게 존재한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급진적으로는 업무시간이 끝나면 모든 메신저 알림을 끄고 전화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해보니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걸 알게 되었지만 모두를 존중할 순 없어요. 회사의 업무문화와 개인의 업무&라이프 스타일을 고려해서 적당히 합의할만한 문화를 도출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